What Is Life?
삶의 의미라는 주제는 언제나 존재했다.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본질과 방향성을 찾으려 했다.
삶의 본질적인 의미 중 하나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자기목적적 행동에 있다.
야망이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쳇바퀴에서 끝없이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려하게 꾸며진 문화적 허식, 외적 규칙과 규범, 기술과 사회적 형태를 벗겨내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같은 동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인내와 상식, 경청하는 능력뿐이다.
사람들의 신념은 변화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초점을 어디에 두든, 눈길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해야 한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다. 삶의 비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없다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
놀랍게도 아직 세상은 사람의 껍질로 그 사람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순간순간의 경험은 껍질보다는 껍질 사이에 더 많은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물건은 관계 형성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물건의 가치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잠재력에 있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식물은 혼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식물은 같은 종이든 다른 종이든 자신을 강화시키는 다른 식물 근처에서 번성한다.
물건 중에는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있다.
이는 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주는 귀한 존재다.
건전한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의 보답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균형과 상호 존중을 위해 갖추어야 할 인간의 신성한 의무다. 환대 안에는 삶의 기본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환대의 개념은 주는 행위보다 받는 행위에 대한 비중이 더 크다. 받는다는 행위에는 겸손과 감사의 능력이 요구된다.
환대는 거의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받는 환대는 반드신 좋은 의미만은 아니다. 선물을 받지 않는 행위는 잠재적 우정에 대한 상대방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존중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의 곁에 있느냐의 여부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용서와 겸손, 감사의 능력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권리와 의무가 가득찬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은 어떤지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의존하지만 어른도 아이들에게 의존한다. 아이들로 인해 어른은 삶의 취약성과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놀이와 상상력은 세상을 잠재력이 넘치는 경이롭고 마법 같은 곳으로 바꾼다.
이혼을 한 많은 사람들은 이혼 후 자신의 삶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된 것에 놀라움과 실망을 표한다.
내가 관계에 의해 창조되며 그 관계 속에서 계속 재창조된다는 깊이 있는 식견에 도달했다면 자아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개인주의는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인도인과 파키스탄인들은 사랑에 기초한 결혼이 변할 수 밖에 없는 찰나의 끌림이라는 비판적 인식이 강하다.
배우자 사이가 오염되었을 때는 이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대가가, 끊어진 관계의 길이와 강도에 비례하는 대가가 따른다. 그들은 결국 연결된 존재가 아닌 분리되고 고립된 존재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길고 다사다난했던 결혼 관계를 끝내는 것은 감성 충만했던 추억의 태피스트리를 만든 수많은 실을 끊는 것과 같다.
다른 종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종의 다름을 인식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인간은 다른 종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지만 종 간의 특성을 무시하고 인간과 똑같이 간주하는 건 도리어 역차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가장 두꺼운 실 즉 가장 가까운 타인, 의미있는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를 당할 때 가장 취약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존재감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좋든 나쁘든 타인과 나를 연결하는 실은 중요하다. 그 실이 보이지 않는 순간 인간은 완벽히 혼자가 된다. 삶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고 다른 어떤 생명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삶을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 기간 동안 가장 큰 손실이라 생각했던 것은 ‘걱정 없이 쉽고 편안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팬데믹의 교훈으로 물질적 생활 수준보다 삶의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흔한 일이며 권리를 신성시하고 옹호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의무에 대해서는 훨씬 덜 이야기한다.
권리와 의무 사이에는 균형이 필요하며 둘 다 과거와 미래로 퍼져나가야 한다.
다른 생물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다른 생물들은 성당을 짓지도 않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지도 않는다.
아메바에서 침팬지에 이르기까지 다른 생물들도 인류와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과 실을 연결하고 거기에 의존한다.
내가 탐색한 모든 관계는 동경과 갈망, 결핍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각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차이는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결핍 자체가 이 진기하고 이례적인 환경에서 가장 희귀한 자원일 수도 있다. 항상 구할 수 있는 것에는 가치가 없다. 오늘날 전 세계 중산층과 상류층이 직면한 큰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풍요다.
삶에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세계는 예전보다 심각한 물질적 결핍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만 지금은 다른 형태의 정서적 결핍이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 새로이 등장한 정서적인 결핍은 점점 그 존재가 커질 것이다.
비가 매일 내렸다면 땅은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갈증을 모르는 사람은 물의 가치를 모른다.
결핍만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육신을 가혹한 조건에 두면서 단련하는 것은 마침내 필요한 것을 얻었을 때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도록 결핍을 쌓는 것이다.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으려면 갈망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고질적인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습관이 나와 내 주변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곧 당신의 관계다.
한계가 없는 세상은 어지럽다.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보통의 풍족함을 누리는 사람들보다 덜 행복하다. 배가 부르면 더 먹을 수가 없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말하듯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으면 뚱뚱하고 게을러지며,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 비참해진다.
인간은 부재를 통해 중요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집중할 수 있다.
낙원에는 항상 뱀이 존재한다.
뱀의 눈에서 종종 달러 표시가 보인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돈은 실용적인 지불 수단이자 교환의 매개체이지만 유일한 문제는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일에 기여하기 전까지는 대체로 공허하고 의미가 없다.
돈이란 산맥과 바다로 갈라져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정보 기술이다. 돈은 세상을 돌아가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류를 한데 묶는 데 있다.
그러나 돈이 사회 영역에 침투하면 신뢰와 공동체는 약화되기 마련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은 점점 소비 쪽으로 향하고 있다.
과거 종교가 차지했던 틈새를 소비주의가 채우고 있다.
광적인 소비는 지구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 자신에게도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소비가 아니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은 어떤 부분에서는 유용하고 필요하지만 사회를 운영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진정한 철학자는 부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부자가 되지 않을 만큼 현명하다.
모든 문화에서 삶에서 의미 있는 것은 물건의 획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인간은 상실된 신앙이 남긴 영적 공허함을 물건과 소비로 채운다.
심하게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편안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미워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두려워한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대로 휴가의 의미는 멋진 휴가를 기대하는 것과 휴가에서 얻은 추억을 공유하는 것 두 가지에 있다. 휴가 자체는 결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울창한 열대 낙원, 번화한 대도시, 산속 휴양지 어디를 가든 나와 관계하는 것들로부터 떨어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기대감은 희망처럼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결핍은 때때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실로 인해 빛나는 경우가 더 많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과 필요한 것 이상이 필요한 것은 다른 얘기다.
분별 있는 철학자는 쾌락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문제를 해결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역경 없이는 성취도 없다. 평지를 걷는 것이 좋아도 가끔은 오르막길을 가야 한다. 편한 내리막길을 가려면 힘든 오르막길이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는 그것의 결핍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평범한 진실이지만 되풀이할만한 가치가 있는 생각이다.
물질적으로 다 가진 듯 보이지만 그것 빼고는 가진 게 없는 이 사회에서 삶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꿈 혹은 희망이다. 한 번쯤 세상의 중심에 서서 크든 작은 자신의 성취를 인정받는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어려운 일을 해냈으면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
비물질적인 결핍을 채우는 이런 행위는 음식이나 섹스의 결핍을 채우는 것과 비교했을 때 자각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이런 비물질적인 결핍을 자각하는 순간 그것은 내 안의 갈망과 허기를 자극하고 마침내 성취를 이루고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면 온전한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모든 선택에는 각각의 대안이 존재하므로 특정한 길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고통이다.
타인의 인정은 일종의 결핍이다.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인간에게 가장 결핍된 요소일지 모른다.
바라던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순간 가난한 자가 되어 버린다.
결핍은 동기를 부여하고 입맛을 돋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꿈을 꾸고 희망을 품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영영 얻지 못할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고대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희망이 없으면 기대하는 것도 없고 우리는 절망적인 사람이 된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자원은 타인의 관심과 시간,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믿을 수 있는 실, 나 자신을 알게 되는 느린 시간 그리고 그 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은 나 자신을 아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내가 살 수 있었던 다른 삶에 대해서도 배움과 깨달음을 준다.
결핍은 삶의 방향성과 집중도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결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삶에 윤활유가 되는 마찰과 저항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마찰과 저항으로 인해 당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에 전력을 다하게 되고, 극도로 어렵지만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성취로 이어진다.
희망이 없으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희망은 꿈에서 자란다.
꿈속 세상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아무도 우리의 꿈을 빼앗을 수 없다.
꿈의 가능성은 삶을 견디게 해준다.
많은 꿈이 실현될 수 없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희망은 꿈에 대한 가시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희망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증류된 꿈이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꿈꾸로 주류에 순응하는 것은 죽은 물고기뿐이다.
자유로운 새는 자유를 꿈꾸고 나서 실제 하늘로 날아간다.
시간은 내 내부와 외부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맹렬한 속도를 피하고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틈새를 만들 수 있다. 가속화되는 정보화 시대에는 자기 이해가 결핍된다. 다양한 소비로 시간의 틈새를 메워버리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은 비현실적일지라도 결국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낙관주의에 불을 붙인다.
세상이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삶을 거부하면 희망의 화살이 아래로 향한다. 그런 상태는 의미도 없고 삶의 질을 높이지도 못한다.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항상 더 나은 법이다.
극복될 수 있는 결핍은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숨가쁜 우리 시대에 가장 결핍된 것이 있다면 바로 느림이다. 나 자신을 알아가거나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만 느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느림 없이는 상상력도 상공으로 이륙할 수 없다.
사람은 시간을 들여야만 자신을 알 수 있고 창의적으로 변할 수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것들은 이런 시간 감각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 세상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은 느리고 반복적인 요소인데, 현대 사회는 불안하고 독창적이며 변화무쌍한 것에 중독되어 있다.
삶의 전체성과 생명의 그물망을 성찰할 때는 다른 가치관, 다른 종류의 지식, 느림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이익을 얻는 일에 아드레날린을 내뿜는다.
느린 산책은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을 수 있게 해주며 과열된 세상에서 결핍된 시간이라는 선물을 선사한다.
혼자 식사를 하는 것과는 달리 혼자 걷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혼자 걷는 것은 관계의 실을 강화하고 회복시키며 새로운 실을 생성한다. 물론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때도 생각과 감정이 해방되는 마법 같은 효과가 있다.
타인이 내게 내어주는 시간은 언제나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은 희소해졌지만 누군가에게 한 시간 혹은 하루 동안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느림은 세상이 정신없이 숨 가쁘게 돌아갈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돌은 오래 간다. 고층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의 공학 기술과 수천 명의 작업자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폐허로 만드는 데는 순간이면 충분하다.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허무는 데는 5초면 족하다. 참나무가 다 자라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지만 2분이면 그것을 베어낼 수 있다.
돌은 다른 시간 감각을 따른다.
돌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과학으로도 다 밝혀지지 않은 혼돈의 힘이다.
<종의 기원>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인 모든 생물이 다른 모든 생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알린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있다. 미래와 과거가 연결된 경첩이 부서지면 남는 것은 미친 듯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뿐이다. 기억은 우리의 실을 뒤로 향하게 하고 상상력은 앞으로 향하게 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과거로 향한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온통 새로움에 중독되어 과거를 잊고 지금의 여기만 우선시하는 것이다.
시간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은 삶 그 자체다. 우리는 곧 시간이다.
시간을 덜 가진 사람들은 도리어 조급함에 시달리지 않는다.
운동선수, 뮤지션, 수학자, 예수 같은 선지자 등 중년 이전에 삶의 정점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느린 성장과 성숙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만족의 강박에 사로잡히는 것은 매사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선택한다는 인간의 약점 때문이다. 느림이 없으면 삶은 숨이 막히고,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머리와 꼬리도 구분할 수 없이 급히 꿰매진 조각이 되고 만다.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긴 삶의 여정에서 작은 톱니바퀴나 먼지 한 줌이 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 창조하는 일보다 파괴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 시대에 우리의 목표는 당장의 충동과 오만 그리고 눈부시지만 뒤틀리고 역설적인 성공을 물리치는 것이어야 한다.
언제가 너무 늦어버린 순간이 될지 알 수 없으므로 완벽한 때를 기다리며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긴 시간도 순간으로 쪼개질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은 모두와 함께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모든 시간은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맞이할 수 있는 순간도 있다.
역사에 깊이가 더해지려면 강렬한 순간이 필요하며, 그것이 기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더 큰 무언가가 된다. 모든 사건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일어나고 세상은 빠른 시간과 느린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을 즐기는 것과 장기적인 안목을 갖는 것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능력은 먼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과는 다른 종류의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둘 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며 둘 다 꼭 필요하다. 가장 맛있는 순간은 번개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때 찾아오는 법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은 관계적이다. 의미는 실과 기대에서 비롯된다. 질병이나 장애,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즐거움으로 빛날 수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만족스럽고 충만한 삶은 밝은 마음을 불행과 불운으로부터 떼어 놓으며, 고통조차 희미하게 옅어지는 강렬한 축복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 속에 저장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아무리 짧은 순간일지라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으며 순간을 통해 삶에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순간의 덧없음과 자신의 하찮음을 인식하는 일은 주로 피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때 자각된다.
순간이 매일의 삶에 소금과 양념을 더해주는 것은 맞지만 실체와 방향을 말해주는 것은 ‘긴 지금’과 ‘큰 여기’이다.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손을 뻗는 것도 삶에서 필요하다. 어려운 일을 해내고 그에 대해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인생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다. 기억에 남는 순간에는 놀라움이라는 요소가 필수이다. 매일의 삶에는 작지만 놀라운 일이 항상 일어난다. 다행히도 그 중에는 즐거운 놀라움이 많다.
또한 세상은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득하다. 새로운 문을 열 때 마주하는 놀라움은 느닷없이 찾아오며 우리는 감정적이고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지혜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이런 작은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인공지능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기 멋대로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호기심이 없다는 것이다.
놀라움과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완전하게 통제되고 엄격하게 계획된 삶을 고집하는 사람은 ‘놀랄 권리’를 포기하는 셈이다. 새롭고 예기치 못한 것을 경험하는 놀라움을 버리는 것이다.
삶은 작은 개인부터 내가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또는 만나지 못하게 될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궁극적으로 선하고 의미 있는 삶은 올바른 균형을 찾는 데 달려 있다.
균형은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필요하다.
균형 없이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행복과 다르다. 의미 있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일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때로는 방향성 없고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공허한 삶일 수도 있다.
상황을 예측하여 차선책을 찾는 것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 사이의 균형 또한 중요하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지만 위험에 끌리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 지루할 틈이 없다. 뇌 안의 더 많은 시냅스를 활성화할수록 더 많은 연결을 촉진할 수 있다. 지금의 가장 큰 문제는 연결을 만드는 마음의 능력이 아니라 정보 과부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다양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외적인 모습도 중요하다. 옷차림은 꽤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나치게 간소한 옷차림은 과한 옷차림보다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광채가 나는 존재감은 직접 측정하거나 관찰할 수 없지만 자신감과 내면의 조화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람들에게 욕망과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만들어진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은 지금과 여기를 크고 깊게 보는 시야로 전체를 조감할 때뿐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느린 시간과 필터가 필요하다. 기술에서 벗어나 느림과 지속적 관심의 미덕을 유지하는 균형이 현대 사회의 핵심 과제다.
데이터는 통계나 언어로 옮겨질 때 비로소 정보가 되고 정보는 더 큰 맥락에 놓일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제서야 데이터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균형을 찾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좋은 평가를 내리는 기술은 다른 균형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나이 먹는 일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전체를 보는 관점을 기를 수 있다는 데 있다.
종교는 감사와 용서, 겸손의 마음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작고 보잘것없는 내가 더 큰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종교의 핵심은 미신과 폭력이 아니고 신과 악마, 천사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거대한 세상 속 인간의 의미에 대해 나누는 대화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순환의 일부이며, 먼지 구름 속 먼지 한 톨, 대양 속 물 한 방울, 유기체 속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다.
인생은 선형적이지 않고 다중 시간적이다. 우리의 수명은 선형적이며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궤적을 따른다. 평생을 쾌락과 재미를 좇아 살았다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어렵다. 목표가 없고 의미가 쌓이지도 않고, 성취에 이르지도 못하는 활동으로는 삶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의미로 가득차 있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작별을 고하고 그동안 쌓아온 실이 설장하고 번성하도록 놓아주어야 하는 시간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때가 되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조용히 공상에 잠길 줄도 알아야 한다. 세상은 다채롭고 가능성이 풍부한 멋진 곳이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내려놓아야 할 때도 분명 있다.
세상은 당신 없이도 잘 돌아가지만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세월 안에 고스란히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