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
지구를 ‘구sphere’라고 부르는 이유는 평균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면이 있더라도 평균적으로 보면 지구는 둥글다. 사람을 보는 우리의 눈도 그래야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경향은 정신 건강을 해치는 주범 중 하나이다. 심리학 연구에서 ‘자기’에 대해 지나친 생각이 남들과 자신을 자주 비교하게 만들고 행복을 저하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진정한 지혜는 나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마음의 습관이다.
사람은 마음 속에 CCTV를 설치해놓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를 보는 것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연극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자신은 스타들처럼 조명 받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쓴다.
어떤 것이든 자신과 관련지어 바라볼 때 기억이 잘되는 현상을 자기 준거(self-reference)효과라고 한다. 똑같은 것이라도 자신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기억을 더 잘하게 된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고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까이 해도 좋다. 이런 사람은 누구와 있어도 상대의 장점부터 보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에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이 남의 허물을 습관적으로 들춰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내용을 보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많이 드러낸다.
허위 합의 효과에 사로잡힌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세상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프레임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을 허위 합 효과(false consensus effect)라고 하며, 자신의 의견이나 선호, 신념, 행동이 실제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착각하는 자기중심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지혜가 기대림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훈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지혜의 본질이 우리 마음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양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평균적인 양’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이에 따라 사람의 행동도 변한다.
현명한 소비자는 소유보다는 경험의 프레임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경험을 위해 구매한 물건은 대부분 사람들과의 관계에 사용되는 것들이다. 이는 어떤 물건의 구매 행위를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소유 자체를 위해 구매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행복감을 안겨준다.
같은 물건을 사면서도 경험 프레임을 갖고 구매하는 사람은 물건을 통해 맛보게 될 새로운 경험에 주목한다.
일상에서 소유의 프레임과 경험(존재)의 프레임이 가장 빈번하게 대비를 이루는 분야는 소비의 영역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프레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위 프레임은 왜 이 일이 필요한지 그 이유와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하위 수준의 프레임에서는 일의 난이도와 시간의 소요, 성공 가능성 등의 구체적인 절차부터 묻는다.
상위 수준의 프레임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며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를 묻는다.
행복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이며 행복은 대상이 아니라 재능이다.
프레임은 결심의 대상보다는 설계의 대상이다. 언어와 은유, 가정과 전제, 단어와 질문, 경험과 맥락 등을 점검하여 더 나은 것으로 설계해야 한다.
우리의 프레임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의 시동이 기차 선로 위에서 갑자기 꺼졌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아버지는 시동을 걸려고 황급히 자동차 키를 돌렸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기차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둘 다 크게 다쳐서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응급실로 달려온 외과 의사가 아들의 차트를 보고 “난 이 응급 환자를 수술할 수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절규를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프레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쉽게 이 의사는 아들의 엄마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과 의사=남자’라는 프레임에 영향을 받는다면 삼류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프레임의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만약 안 좋을 일과 좋은 일을 하나씩 경험할 수 있다면 무엇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 좋을까? 답은 대체로 안 좋은 일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 낫다. 안 좋은 일 다음에 경험하는 좋은 일은 더 달콤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뒤의 좋은 경험이 앞의 안 좋은 경험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해주기 때문이다.
인생에서는 순서가 중요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듯이 젊은 시절의 고생이 인생 후반의 경험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질문의 순서가 중요한 이유도 앞의 질문이 뒤에 나오는 질문을 해석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앞의 경험이 뒤에서 하게 될 경험을 바라보는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기 삶에 대한 평가가 시시하다면 내가 시시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답이 안 나오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질문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무언가 더 나은 답을 찾고 싶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던지고 있는 질문부터 점검해야 한다.
마지막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각별하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그 프레임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평가를 극적으로 바꾼다.
어떤 상황에 처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후의 맥락에서는 보이기 마련이다. 역지사지란 상대의 맥락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지각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선택적으로 제약하고 궁극적으로 지각과 생각의 결과를 결정한다.
우리 마음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계 밖에 존재하는 새로운 곳으로의 적극적인 진군을 의미한다.
건물 어느 곳에 창을 내더라도 그 창만큼의 세상을 보게 되듯이 우리도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만을 바라본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뉘지 않는다.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뉠 뿐이다.